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 침공 (문단 편집) == 독일군 참전과 전역 종결 (1941. 4) ==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군]]의 [[발칸반도]]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그리스는 서부[* 알바니아 방면], 중부[* 유고슬라비아 방면], 동부[* 불가리아 방면]라는 광범위한 지역을 방위해야 했으며, 이 규모의 방어전은 그리스군의 역량을 초과한 것이었다. 이성적인 대응책은 그리스 중부로 후퇴하여 전선을 축소시키는 것뿐이었지만, 이 경우 [[발칸 전쟁]]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걸쳐 얻은 동부 전체와 [[테살로니키]] 같은 중요 항구도시를 포기해야 했고 그리스군과 그리스 정부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이탈리아군을 밀어붙이고 있는 서부 전선이나 메탁사스 방어선이 건재한 동부 전선과 달리 중부 전선은 아무런 방어 시설 없이 소수의 경계 병력만 있는 상태였다. 이는 '''유고슬라비아가 건재하여 [[중립국]]으로 남는 것'''을 상정한 것으로, 설령 유고슬라비아가 침공당하더라도 그리스와 우호국이며, 어느 정도 체급도 갖춘 나라이니 병력전개를 할 시간은 벌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신인 [[세르비아 왕국]]은 1차대전 때 1915년 불가리아가 옆구리를 때리기 전까지 오헝제국을 상대로 버텨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기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다민족 국가가 되면서 오헝제국에 있던 민족문제가 고스란히 옮겨가 버렸고 유고슬라비아의 100만 대군은 추축국의 전면침공 속에 민족문제까지 터져나오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유고슬라비아가 예상을 깨고 [[유고슬라비아 침공|별다른 저항도 없이 2주만에 홀라당 무너져버리면서]] 중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전략적 공백은 영국군의 지원으로도 커버할 수 없었고, 독일군은 당연히 이 약점을 찔렀다. 불가리아 방면의 동부전선에서는 메탁사스 방어선 정면으로 독일군 제18산악군단[* 원래는 일반 보병군단이었으나 1943년에 산악사단 중심으로 구성이 바뀌면서 산악군단으로 변경된다. 당시 사령관은 [[프란츠 뵈메]] 보병대장으로 뵈메도 나중에 보병병과에서 산악병과로 변경한다.]의 5산악사단, 6산악사단, 72보병사단과 30군단의 50사단, 164사단이 공세를 펼치는 사이, 제2기갑사단이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국경을 넘어 방어선 후방의 항구도시 테살로니키를 함락하고 메탁사스 방어선을 포위해 버렸다. 결국 메탁사스 방어선의 그리스군 6만여 명은 독일군에게 항복, 동부전선은 붕괴되고 이 여파로 이름만 남아있던 중부전선도 무너졌다. 4월 15일, 중부/동부전선이 내륙으로 크게 후퇴하자 그리스-영국 연합군은 패주를 시작했다. 당시 영국 공군은 아직 본토방위에도 힘겨운 상황이라 그리스 일대의 제공권은 루프트바페가 꽉쥐고 있었고, 이들의 퇴로는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Ju87]], [[Ju 88]]의 폭격에 피로 물들었다. 그나마 남은 영국 공군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는데 유명한 작가인 [[로알드 달]]이 참여했었고, 이는 그의 자서전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당시 절망적인 교전 중 아테네에서 13기의 [[호커 허리케인]]으로 200여기의 독일 전투기와 맞서(!) 90분동안 27기를 격추하는 대전과를 이루기도 했다.[* 호커 허리케인은 중요부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뼈대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물량이 딸릴 때 임시방편으로 나무와 천막으로 만든 전투기라는 이미지가 생길 정도로 난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전투기였다. 그런데 이런 전과를 올렸으니 가히 대승이라 할 만하다.] 이 사투의 치열함은 전투기 에이스인 팻 패틀(Pat Pattle)[* 공인격추 34기 비공인격추까지 합산시 64기. 비공인기록까지 영연방 최고에이스가 되는 인물.]이 이 전역에서 전사할 정도로 엄청났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 지휘부는 목표를 그리스 방어에서 영국 원정군의 철수로 방침을 바꿨다. 이는 동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아프리카군의 예상치 못한 공세로 전선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대한 패배로 국가방위가 불가능해지고 영국이 철수를 준비하자 절망감에 빠진 그리스의 새 총리 코리지스는 4월 18일 권총자살했다. 한편, 서부 알바니아 전선의 주공을 맡은 이탈리아군은 '''또 다시 전면공세가 실패로 돌아가 공세계획을 망가뜨릴 뻔 했다.''' 서부 알바니아 전선의 주공이 그리스와 영국군에 넘어가면서 '''공세중이던 독일군 측면을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부/동부 전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역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를 가만히 내버려둘 독일군이 아니었다. 그리스군의 후퇴를 차단하기 위해, [[슈츠슈타펠]]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 여단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내려가는 공세를 단행했다. 그리스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탈리아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독일군이었다.[*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 당시 SS 무장친위대의 경우 처참한 전투력에 국방군 육군 부대들에게 무시당하기 일 쑤였다. 하지만 앞선 두 전역에서의 실전 경험으로 그리스 침공 당시 아돌프 히털러 여단의 전투력은 이전에 비해 향상이 된 상태였고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걸치면서 타 무장친위대 부대들의 전투력 역시 크게 좋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친위대 정예부대들이 국방군 정예부대들보다도 우위에 서게 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43년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때 부터이며 1943년 말 힘러가 군수권을 장악하며 무장친위대에게 보급이 우선적으로 지급된 후의 일이다.] 독일군의 포위에 그리스군은 고립되었고, 탈출을 위한 마지막 총반격을 개시했으나 독일군의 역습으로 좌절되자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사령관은 4월 20일 항복한다. 웃긴 것은 이 때까지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탈리아군은 그리스군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더 웃긴 것은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가 항복 조인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항의해서 4월 23일에 다시 항복하는 개그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이때 항복한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사령관 요르요스 촐라코글루(Γεώργιος Τσολάκογλου)는 독일군 상대로 선전했다는 평가와 호의적인 반응을 받으며 독일의 그리스 괴뢰정부 수상으로 옹립된다.] 4월 24일에는 과거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영국군은 지연작전을 개시, [[2파운더]] [[대전차포]]의 매복사격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독일군 기갑부대의 공세를 격퇴했으나 결국 독일 산악부대의 우회공격으로 패퇴한다. 그래도 철수작전을 위한 귀중한 이틀의 시간을 벌었다. 테르모필레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은 크레타 섬으로 철수했으며 알바니아와 메탁사스 방어선에서 병력 대부분이 항복해버린 그리스는 저항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4월 27일, 독일군 선두부대가 [[아테네]]에 입성함으로써 그리스 전역은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